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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것들의 역사

[실록이야기] 너무 많이 먹어 슬픈 짐승이여

*조선 태종때 일이다. 일본에서 넘어 온 태국 코끼리가 조선땅을 밟게 되었다.

 푸른숲 제공

일본 국왕(日本國王)  원의지(源義持)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코끼리를 바쳤으니, 코끼리는 우리 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명하여 이것을 사복시(司僕寺)에서 기르게 하니, 날마다 콩 4·5두(斗)*씩을 소비하였다. 태종실록 21권, 태종 11년 2월 22일 계축 2번째기사  1411년 

*두는 말이라고도 하는데 1말은 18L 정도의 부피. 4~5두면 72~92L 의 양이된다. 하루에 2~300kg을 먹는다고 알려진 코끼리. 먹을게 넉넉하지 않던 시절엔 말그대로 애물단지였다.

전 공조 전서(工曹典書)  이우(李瑀)가 죽었다. 처음에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순상(馴象)*을 바치므로 3군부(三軍府)*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이우가 기이한 짐승이라 하여 가보고, 그 꼴이 추함을 비웃고 침을 뱉었는데, 코끼리가 노하여 밟아 죽였다.  태종실록 24권, 태종 12년 12월 10일 신유 6번째기사  1412년

*길들인 코끼리

*현재의 합참본부 쯤 되겠다.

코끼리[象]를 전라도의 해도(海島)*에 두도록 명하였다. 병조 판서  유정현(柳廷顯)이 진언(進言)하였다.

"일본 나라에서 바친바, 길들인 코끼리는 이미 성상의 완호(玩好)하는 물건도 아니요, 또한 나라에 이익도 없습니다. 두 사람을 다쳤는데, 만약 법으로 논한다면 사람을 죽인 것은 죽이는 것으로 마땅합니다. 또 일 년에 먹이는 꼴은 콩이 거의 수백석에 이르니, 청컨대, 주공(周公)*이 코뿔소와 코끼리를 몰아낸 고사(故事)를 본받아 전라도의 해도(海島)에 두소서."

임금이 웃으면서 그대로 따랐다.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11월 5일 신사 4번째기사  1413년

*전라도의 섬 어딘가

*주공은 주나라의 "주공 단"을 지칭하며, 중국 고대사 최고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길들인 코끼리[象]를 육지(陸地)로 내보내라고 명하였다.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하기를,

"길들인 코끼리 순천부(順天府)  장도(獐島)에 방목(放牧)하는데, 수초(水草)를 먹지 않아 날로 수척(瘦瘠)하여지고,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립니다."

하니, 임금이 듣고서 불쌍히 여겼던 까닭에 육지에 내보내어 처음과 같이 기르게 하였다.  태종실록 27권, 태종 14년 5월 3일 을해 4번째기사  1414년

*대략 6개월만의 유배가 풀린것이다. 위의 코끼리게이트는 세종때까지 이어진다.

충청도 관찰사가 계하기를,

"공주(公州) 코끼리를 기르는 종이 코끼리에 채여서 죽었습니다. 그것이 나라에 유익한 것이 없고, 먹이는 꼴과 콩이 다른 짐승보다 열 갑절이나 되어, 하루에 쌀 2말, 콩 1말 씩이온즉,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입니다. 화를 내면 사람을 해치니,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니, 바다 섬 가운데 있는 목장에 내놓으소서."

하였다. 선지(宣旨)하기를,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이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3월 14일 병자 5번째기사1421년

*1섬은 10말이니 180L 이다. 이쯤되면 일본은 선물을 가장한 골치 덩어리를 조선에 넘긴듯 해 보인다. 그 뒤에도 여러마리의 코끼리가 실록에 등장한다.  

이래저래 코끼리는 조선시대 "뜨거운 감자"가 아닐 수 없었다.